<남수단에서 by 신재호>
아프리카 남수단으로 해외 파병을 마치고 귀국한 훈남 신재호군(연세대 동아시아국제학부 11학번)의 인터뷰입니다!
1.안녕하세요! 재호씨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신재호 by 위대>
안녕하세요. 연세대학교 동아시아국제학부 11학번 신재호입니다.
2.군복무 당시 해외 파병을 다녀오셨다고 들었는데 어느 나라였나요?
<남수단 파병 당시 대대장님과의 악수 모습 by 신재호>
저는 이기자 부대에서 복무하였고 탱크 조종사였습니다.
상병 때 기회가 돼서 통역병으로 남수단에 파병이 되었습니다.
3.영여를 잘하셔서 남수단으로 파병 기회를 잡으신 것 같은데 혹시 토익 성적이 높나요?
<남수단에서 한빛부대 훈련 당시 모습 by 신재호>
토익 점수는 990점입니다.
이기자 부대 배치를 받고 굉장히 열심히 훈련에 임하고 복무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특급병사로도 선정을 받고 탱크 조종교육 때 상도 받았었습니다.
지속적으로 모범적인 생활을 보여드리고 토익 점수도 조금 높다보니 대대장님이 좋게 봐주셔서 남수단에 갈 수 있었습니다.
4.남수단 파병에 선발되기까지 어떤 절차를 통과해야 하나요?
<대한민국 남수단 재건지원단 by 신재호>
별도의 면접은 없고 부대 직속 지휘관님의 추천서 및 소견서가 합격의 당락을 좌우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앙선발 인원으로는 통역병은 11명 뽑았습니다. 작전지원대 통역병 4명, 경비대 통역병 6명 그리고 제 보직인 공병대 통역병 1명이었습니다.
5.영어를 잘하게 된 계기가 있나요?
<남수단에서 한빛부대원들과 by 신재호>
어머니께서 영어 학원을 하셔서 어릴 때부터 영어공부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무역 일을 하셔서 Buyer들이 집에 오면 영어를 사용해야 했으며 아버지와 어머니를 따라서 해외에 자주 다녔습니다.
초등학교 때 방학을 틈틈이 활용하여 뉴질랜드 2번, 캐나다 2번, 싱가포르 중국 일본 미국 등 여러 나라를 갔습니다.
6.그럼 정확히 언제 남수단으로 파견됐나요?
<부대에 설치된 온도계, 기온이 50도를 넘어 섰고 습도는 65%정도 by 신재호>
2013년 10월1일부터 2014년 5월1일까지 8개월 정도 복무를 했습니다.
짧으면서도 굉장히 긴 시간이었습니다.
7.재호씨가 남수단에서 맡았던 일은 어떤 것들이 있나요?
<남수단 정부관계자들과 대대장님 간의 통역을 맡고 있는 by 신재호>
제가 한빛부대에서 주로 한 일은 UN 및 종글레이 주 정부 관계자들과 업무협조시 부대장님들을 보좌하며 통역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업무 조율을 하다보면 UN에서 때로는 무리한 부탁을 해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비록 우리나라가 업무 수행능력이 탁월하고 UN에서의 무한한 신뢰로 인해 요청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임무를 수행할 장비가 다른 일에 가동되고 있는 상태에서 업무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UN직원 및 정부 관계자들에게 차 후 업무에 대해서 조율을 하는 작업을 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휘관님 아래에서 저는 업무조율을 할 때 서로의 요구가 지나쳐 얼굴을 붉히게 되는 경우 어떻게 처신을 하여야 하는지 또는 업무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대표로서 해야 하는 행동들을 옆에서 보며 많은 것을 배우곤 했습니다.
8.남수단에서 제일 뿌듯했을 때가 언제였나요?
<한빛부대원과 아이들 by 신재호>
남수단에 처음 도착하였을 당시의 모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뚜꿀’이라고 불리는 소똥과 흙으로 빚은 집에서 사람들은 생활을 하였으며 나일 강이 범람하여 생성된 한 개울가에서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고 군무원님께서 ‘이것이 한국 전쟁이후 우리나라 당시의 모습이다’ 라는 말에 저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나오듯이 우리나라 아이들은 미군들에게 초콜릿을 외치며 따라갑니다.
남수단에서는 아이들이 우리나라 군을 보면 물! 팬! 을 외치며 따라옵니다.
우리나라가 이러한 척박한 상황에서 발전을 이룩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정말 기적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또한, 저희 부대가 온 당시 처음에는 경계심을 가지고 저희를 바라봤지만 지속적인 재건작전과 인도적 지원으로 인해 아프리카 아이들은 저희를 보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안녕하세요! 혹은 태권도까지 보여주는 모습을 보면서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9.남수단에 있으면서 제일 위험했던 일은 어떤 것인가요?
<한빛부대 중장비 by 신재호>
12월 24일 내전이 발발한 후 저희가 주둔하고 있는 보르시에서 본격적으로 정부군과 반정부군의 교전이 있었습니다.
태어나서 처음 듣는 방사포, 박격포, 곡사포 소리 그리고 저희가 타깃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25t 트럭을 피탄 방어막으로 삼아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은 정말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으며 지금도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때를 생각하곤 합니다.
다행히 지휘관님들의 진두지휘로 인해 저희는 마음을 다잡고 두려워 할 시간 없이 바로 전국에서 몰려오는 피난민들의 보호소를 건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0kg를 넘는 중무장을 하고 저희 부대원들은 늦은 시간까지 작업을 하여 단기간에 2만 명 이상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수용소를 건설하였습니다.
피난민들에게 물을 공급하여야 했기에 저희 부대는 단수를 하기 시작하였고 일주일에 한번정도 샤워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저는 한층 더 성장을 할 수 있었으며 한국에 돌아와서 무엇이든지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마인드가 생겼습니다.
10.남수단에서 음식은 입에 맞았나요?
<한빛부대 아침 식사 by 신재호>
음식은 거의 한국식이지만 공급되는 재료를 남수단에서 구하기 때문에 약간씩 맛이 달랐던 것 같습니다.
단지 열대과일 예컨대 망고 그리고 파인애플이 정말 맛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11.군 입대를 앞둔 친구들에게 해외 파병을 권하실 의향이 있나요?
<남수단 시민들과 포즈를 취하고 있는 by 신재호>
저희 부대 모토는 ‘남수단에 희망을! 조국에 영광을!’입니다.
남자라면 다 해야 하는 군 생활, 한국을 대표하여 해외에서 국위 선양하는 것은 정말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12.해외 파병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느낀 점이 있나요?
<남수단의 밤하늘 by 신재호>
국제기구 및 국제적인 기업에서 취직을 하려는 친구들 혹은 앞으로 군대를 가야 하는 친구들에게 저는 이러한 직접적인 경험의 값어치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 싶었습니다.
요즘 스펙을 만든다는 것처럼 이런 저런 멋진 자격증 및 영어 성적을 위해 공부하기 전에 먼저 자기가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서 도전을 할 수 있는 직접적인 경험을 해보는 것은 어떨지 묻고 싶습니다.
현장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며 그 현장에서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무언가를 이루어 내어 성취감을 느껴보면 분명 어느 자격증에서도 배울 수 없는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3.재호씨가 현재 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요?
<서울시 양재동에 위치한 외교센터 by 외교센터>
현재 외교센터에 들어가려고 준비 중입니다.
외무고시가 폐지된 이후 외교관이 되기 위해서는 시험을 보고 외교센터에 들어가야 되거든요.
14.외교관이 아니라면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유엔난민기구 로고 by 유엔난민기구>
기회가 된다면 UNHCR(유엔난민기구) 같은 곳에서 일을 해보고 싶습니다.
남수단에 있을 때 UNHCR(유엔난민기구)와 함께 일을 한 적이 있는데 정말 여기서 난민들을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는 모습을 보며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거리에서 우연찮게 UNHCR(유엔난민기구) 모금하시는 분들이 보여서 바로 달려가서 신청하고 후원을 했습니다.
15.신입생 학우들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부탁 드립니다.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 by 신재호>
되도록 군대는 일찍 가시고 학점 잘 관리하시고 대학교에서 제공되는 다양한 대외활동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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